
작년 리사이틀에서 좋은 기억을 남겨준 알리스 사라 오트가 서울시향과 협연을 한다고 해서 공연 예매를 했었는데...

사유는 갑작스러운 수술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까지는 그 뒤로 공개된 소식은 없는 상황. 얼른 회복하길... 여하튼, 이 공연을 예매한 이유가 알리스 사라 오트의 연주였기에 예매 취소를 잠깐 고민했다가, 그냥 가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김선욱의 연주(피아노, 지휘 모두)를 실황으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데다, 모 커뮤에서는 '지휘는 미묘하지만, 피아노는 인정한다.'는 식의 글을 많이 봤기에 그 모두를 접할 수 있을 기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공연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다.
=====<1부>=====
Modest Mussorgsky(Orchestration: Nikolai Rimsky-Korsakov)-민둥산에서의 하룻밤
Ludwig van Beethoven-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op.58
--<encore>--
Robert Schumann-어린이 정경 op.15 中 12번 '아이는 잠잔다', 13번 '시인의 이야기'
=====<2부>=====
Johannes Brahms-교향곡 2번 D장조 o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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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의 하룻밤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로제스트벤스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시향을 지휘했던 공연에서 접했던 적이 있었다.(링크: https://electromito.tistory.com/77) 오래전이지만 '저 동작을 보고 어떻게 앙상블을 맞출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드는 독특한 지휘법과, 첫 곡으로 연주한 이 곡이 시작할 때,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비로우면서 으스스한 음색을 들었던 것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평소에 들을 일 없는 이 곡을 알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씩씩하지만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드는 아쉬운 연주였다. 이 곡은 크게 혼란스러우면서도 요란한 전반부와 다소 정적인 후반부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으스스하기보단 기계적이면서 씩씩한 분위기로 서막을 열었다. 이후에도 비슷한 느낌으로 연주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힘차고 화려한 분위기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서로 좋은 시너지를 낸다고 생각했는데(유사한 모티브가 다양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이용해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나)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단순 반복되는 듯한 느낌의 연주가 계속해서 들리니 서서히 지루하단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정적인 후반부 역시 무난함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기는 어려운 연주였다. 서곡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공연이 거의 없었기에, 이 역시 오늘의 특이한 경험이라면 경험이랄까나...?
이어서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 피아노 세팅을 해야 해서 서곡과 협주곡 사이에 꽤 긴 준비 시간이 주어졌다. 보통의 협주곡 세팅과는 다르게 피아노를 세로로 오케스트라 중앙에, 그리고 뚜껑도 아예 제거한 상태로 두었다. 오케스트라의 규모도, 현악기 주자를 절반 정도로 줄여서 작게 유지를 했다.
일단 김선욱의 피아노 연주부터. 2층 중앙 좌석의 경우, 내 기억에는 소리의 잔향이 길어 다소 명료함은 떨어지는 자리였는데 오늘만큼은 정말 또렷하게 분리되는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무척 놀랐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어려워한다는, 홀로 등장하는 피아노의 첫 도입부부터 자신감 있는 연주를 들었고, 그것이 곡 전반에 걸쳐서 이어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음색의 변화보단 또렷한 터치와 템포의 완급 조절을 통해서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이를테면 2악장에서, 당시 음악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불협화음(하단 악보 빨간색 ), 뒤이어 오른손 트릴과 왼손 하강음이 등장하는 (하단 악보 초록색 부분)에서 이를 극명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빨간색 부분에서 음색을 완전히 바꾸어 강조하는 스타일(대표적으로 안드라스 쉬프의 녹음)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화성의 변화를 하나씩 짚어가는 듯한 오늘의 접근법도 괜찮았던 데다, 초록색 파트의 6 연음에 과감한 아첼레란도를 거는 해석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명료하게 들리는 트릴은 덤!

3악장은, 처음에는 무난한 템포로 시작했는데, 갈수록 템포가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3악장이 론도 형식이라 주 테마가 여러 번 반복되기에, 점점 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듯한 이러한 접근법이 꽤 마음에 들었다. 템포가 당겨지는 와중에도 피아노의 연주가 무너진다거나 하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해서 더 괜찮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연주가 아주 완벽한 것은 아니긴 했다. 가끔씩 미스터치가 나오거나, 명료한 음표들 사이에 살짝 뭉개지는 듯한 프레이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게 전체적인 연주를 폄훼할 정도로 거슬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1악장은 2~3악장과는 다르게 포인트를 짚을만한 구석이 없는 무난한 연주였는데, 후기를 쓰면서 생각해 보니, 지휘와 독주를 같이 해야 하는 데다 피아노의 비중이 극도로 높은 2악장, 잦은 반복이 있는 3악장과는 다르게 1악장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서로 긴밀하게 앙상블을 맞춰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모험적인 접근을 택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의 인원을 다소 줄인 것도, 좋은 효과를 가져다준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다른 협주곡들과는 다르게, 그나마 음량적인 측면에서 독주악기의 존재감을 쉽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이 피아노 협주곡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케스트라가 피아노의 소리를 잡아먹는 순간을 자주 겪어서 아쉬움을 느끼곤 했었는데, 오늘만큼은 단 한 번도 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앙코르 곡으로는 슈만의 곡을 연이어 2개 해주었는데, 이 역시 꽤 좋게 들었다. 다만 앙코르 중간에 근처에서 알람소리가 꽤 길게, 그리고 뒤이어 폰을 떨어뜨리는(아마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은데...) 실례를 범하면서 감상하던 집중력이 확 흐트러진 것은 정말 아쉬운 부분.
2부의 브람스 교향곡 2번은, 지휘자로써의 김선욱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아쉬운 점이 동시에 느껴지는 연주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만족스러웠기에 아쉬운 점부터. 아직 디테일을 다듬는 것이 부족하단 느낌이 있었다.
2악장에서 첼로로 연주되는 테마를 1 바이올린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두 악기 간에 다이내믹이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거나(악보 상에서는 둘 다 poco f로 되어 있다.) 악장의 끝의 목관악기들 간의 코드가 화성적으로 이상하게 들렸던 것, 4악장에서 정박과 엇박 사이로 나타나는 8분 음표 리듬(정확하진 않은데, 이 부분이었던 것 같다. 하단 악보 참고)이 미묘하게 둔중하게 들렸던 것을 들었다.

반면 김선욱이 가지는 장점은, 앞선 베토벤 연주에서도 보여주었듯, 하나의 곡에 대해 전체적인 틀을 잡고 그 안에서 템포, 다이내믹 등의 완급 조절을 통해서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1악장의 경우 삐끗하면 지루하고 피상적인 음악을 연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김선욱의 지휘에서는 '완급 조절'을 활용하여 꽤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클라이맥스 이후 호른의 솔로로 한껏 분위기를 이완시켰다가 음악이 마무리되는 부분으로(악보를 보니 템포 변화 지시가 적혀 있긴 하지만...) 이를 꽤 멋지게 처리했단 느낌을 받았었다. 4악장의 경우에는, 사실 다이내믹의 변화는 조금 더 컸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있었고 한껏 템포를 높였다가 앙상블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향한듯한 아찔한 순간도 살짝 느끼긴 했었지만, 이러한 접근이 꽤 재미있게 느껴지는 구석도 있었고, 공연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연주로 흥분을 자아내기엔 충분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 기억나는 점이라면 1악장에서(정확히 어느 포인트인지는 지금 기억이 살짝 가물가물하긴 한데) 총주가 진행되는 와중에 현악기 군들 사이에서 비슷한 모티브를 서로 주고받는 부분이 있었는데 다른 악기들이 연주하는 와중에서도 1 바이올린과 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선명하게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이 역시 어느 포인트인지 가물가물한데...) 존재감이 자주 지워지곤 하는 바순을 강조해서 꽤나 멋진 사운드를 만들어낸 것 등이 있었다.
물론 큰 그림과 세부 묘사 모두 잘 해낼 수 있어야 좋은 지휘자라고 할 수 있지만, 둘 중 하나를 (굳이) 택하자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단 생각은 든다. 세부 묘사만을 강조하는 공연을 거의 2년 전에, 같은 악단의 연주로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https://electromito.tistory.com/882) 그 당시 연주는 여전히 나쁜 방향으로 기억을 할 만큼 별로였다. 오늘 연주는,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공연장을 나오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정말 여담이지만, 만약 프로그램이 변경되지 않고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이 무대에 올랐으면 어떤 연주를 들을 수 있었을까? 란 생각을 했었는데, 적어도 오케스트라 반주에서는 썩 좋은 평가를 못 내릴 연주가 되지 않았을 것만 같다. 아무래도 (오케스트레이션을 새로 했으니)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라벨 모두 관현악법을 화려하게 쓴다는 공통점이 있고, 오늘 연주를 통해서 봤을 때 확실히 김선욱은 독일-오스트리아계 음악과 더 맞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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