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년, '23년, 그리고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와 함께 했던 '25년에 이어 올해도 안드라스 쉬프의 공연을 보러 왔다. 좋아하는 노장 피아니스트가, 거의 매년 한국에 오셔서 연주를 해주신다는 건 큰 행복이 아닌가 싶다. 매년 말, 속속 공개되는 공연 정보들을 보면서 '올해도 오시겠지?'라는 기대감도 가지게 만들고 말이다.
그 기대에 맞게, 올해도 안드라스 쉬프는 한국을 찾아주셨고 이렇게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의 리사이틀에서, 모두 프로그램을 사전에 공지하지 않은 것처럼 이번 공연도 동일하게 진행이 되었다. 조금 다른 점은, 이전의 공연들이 '렉처 콘서트'란 콘셉트로 먼저 작곡가와 곡에 대한 설명을 한 뒤 연주를 했다면 오늘은 해설 없이 '이번에는 어떤 곡을 연주하겠습니다.'만 말하고 바로 연주를 진행하는 형태였다. 통역이 필요 없었던 이유도 이러한 이유였던 것 같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고, 내가 갔던 두 번의 공연에서(+앙코르까지 포함하여) 이미 들어봤던 곡은 이탤릭체로 표기를 해두었다.
=====<1부>=====
Johann Sebastian Bach-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 중 아리아
Johann Sebastian Bach-사랑하는 형과의 작별을 위한 카프리치오 Bb장조 BWV.992
Joseph Haydn-안단테와 변주곡 f단조 Hob.XVII:6
Johann Sebastian Bach-이탈리아 협주곡 F장조 BWV.971
Wolfgang Amadeus Mozart-론도 a단조 K.511
Johann Sebastian Bach-반음계적 판타지아와 푸가 d단조 BWV.903
Ludwig van Beethoven-피아노 소나타 17번 d단조 op.31-2 '템페스트'
=====<2부>=====
Franz Schubert-알레그레토 c단조 D.915
Franz Schubert-3개의 피아노 소품집 D.946 中 1번 eb단조
Franz Schubert-즉흥곡 D.899 中 3번 Gb장조
Franz Schubert-헝가리안 멜로디 b단조 D.817
Franz Schubert-3개의 피아노 소품집 D.946 中 2번 Eb장조
Franz Schubert-6개의 악흥의 순간 D.780 中 3번 f단조
Franz Schubert-3개의 피아노 소품집 D.946 中 3번 C장조
=====<앙코르>=====
Johannes Brahms-3개의 인터메초 중 1번 Eb장조 op.117-1
Frideric Chopin-마주르카 15번 C장조 op.24-2
Frideric Chopin-마주르카 13번 a단조 op.17-4
Wolfgang Amadeus Mozart-피아노 소나타 16번 C장조 K.545 中 1악장
Frideric Chopin-녹턴 5번 F#장조 op.17-2
작곡가 미상-피아노 뚜껑 덮기
==========
1부의 모든 곡에 이탤릭체로 표기가 된 것이 보이시는가? 심지어 템페스트의 경우 '22년, '23년에 모두 연주했던 곡이고 당시 안드라스 쉬프가 이 곡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했는지도 기억이 날 정도라, 이 곡을 연주할 때 '우와!'란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아... 또?!'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집을 나서면서도 '아 제발... 템페스트 말고 다른 곡을 연주해 주길...'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그 기대가 박살이 났다. 32개의 곡들 중,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로 들어보고 싶은 소나타가 여럿 있는데 말이다. 그 와중에 연주는 좋아서 실망과 감탄이 뒤섞인 감정이 내내 들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오늘 1부의 연주들은, 내 기억 상에 존재하는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일단 그의 음색이나 모든 성부들을 또렷하게 들리게 만드는 표현력, 화성적으로 중요한 음들을 특히 강조하여 음악을 색다르게 들리게 만드는 것까지는 그대로였지만, 템포의 변화가 이전의 공연들에 비해서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례로, 두 번째 곡으로 연주한 바흐의 카프리치오 Bb장조의 푸가가 등장하는 부분이나, '템페스트 소나타' 3악장 도입부의 분위기가 서서히 고조되는 프레이즈에서 템포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탈리아 협주곡 3악장은 '이전에 연주했을 때 이렇게 정신없이 빨랐었던가? 싶을 정도였고 말이다.(물론 내가 잘못 기억했던 것일 수도 있다.)
바흐를 연주하면서 페달을 쓰는 것 같은 모습을 본 것도 내게는 좀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인터뷰를 수록하여 출판된 '안드라스 쉬프-음악은 고요로부터'(산지니)에서, 그는 '바흐가 살던 시절의 건반악기에는 페달이란 것이 없었기에, 그의 곡을 연주할 때도 페달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얘기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지속적으로 음악 연주를 하면서 더 좋은 연주를 위해, 혹은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이전의 음악적 신념을 바꾸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말이다.
또한 오늘 연주를 들으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피아노의 잔향이 크고 길게 남아 있어서 처음에는 안드라스 쉬프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적응해서 조금 더 풍부한 잔향이 울리게 하는 노하우를 알았나? 란 생각이 들었다.
하이든의 '안단테와 변주곡 f단조'의 종결부에 서라던가 '렉처 콘서트'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템페스트 소나타 1악장'에서의 페달링을 통해서 소리를 겹겹이 쌓아가는 것이, 이전에는 집중력을 발휘해야 느낄 수 있었던 것을 오늘 공연에서는 쉽게 들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밀은... 오늘 공연에서 연주한 피아노가, 안드라스 쉬프가 애용하는 '뵈젠도르퍼'가 아니라 '스타인웨이 앤 손스'1로 달랐다는 것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으윽... 공연 내내 평소의 피아노에서 듣던 모든 음을 잡아먹을 듯한 웅장한 저음, 찢어질 듯한 고음을 전혀 들을 수가 없어서 '아 역시 뵈젠도르퍼의 음색이 다르긴 하네'란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ㅠㅠㅠ
한 편으로는, 왜 '스타인웨이 앤 손스'가 대부분의 피아니스트가 사용하는지를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단순히 앞서 언급한 소리의 잔향 문제뿐만 아니라, 이전 두 공연에서보다 음의 명료도가 훨씬 좋단 느낌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연주가 바흐의 '반음계적 판타지아와 푸가 d단조'였다. 그 당시 후기에 '대부분의 곡들에서 명확한 조성감을 느낄 수 있는 당대 음악과는 다르게, 곡명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반음계로 이뤄진 멜로디가 자유롭게 등장하면서 중심조성을 명확하게 알기는 어려운, 그렇지만 현대음악과 같이 완전한 혼돈의 영역으로까지는 가지 않는, 그 미묘한 균형이 내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라고 적었었는데 오늘 연주에서는 반음계로 움직이는 음들이 전부 귀에 들리는 놀라운 순간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대위적인 움직임도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덤(물론 이건 안드라스 쉬프의 장기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2부, 사실 인터미션 때 '아... 이전이랑 프로그램이 중복되는 것이 많아서 다음번에 안드라스 쉬프가 내한을 오더라도, 한 번은 쉬어가야 하지 않을까?'란 고민마저 했었다. 근데 2부에 연주한 슈베르트의 곡들이 그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쓸쓸함이 느껴지는 D.915를 시작으로, 격렬함과 평화로움이 공존하는 D.946의 1번을 지나,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고 실연으로 너무나 들어보고 싶었던, D.899의 3번(Gb장조)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감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혀 헝가리답지 않은' 헝가리안 멜로디를 지나 아름다움과 분노, 불안감이 공존하는 D.946의 2번,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D.780으로 잠깐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에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D.946의 3번으로 마무리.
곡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eb단조->Gb장조로 이어지는 구성(동일하게 b이 6개 붙음)이나, c단조로 시작해 C장조로 마무리가 되는 등을 생각해 보면 D.946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마치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연주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끔 구성한 프로그램이란 생각이 들었고, 내 기억이 맞으면 작품 사이에 작은 프레이즈를 즉흥적으로 넣어 이러한 효과를 확실히 나타내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3번째로 연주한 D.899의 3번. 하나의 긴 선율 아래에 아르페지오가 흩뿌려져 있는 이 곡은, 얼핏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가는 곡처럼 들리지만 아래에서 흐르고 있는 아르페지오로 조성적인 변화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곡으로 내게는 이것이 되돌릴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 미련, 후회와 같은 감정이 어지러이 뒤섞인 듯한 느낌을 계속 받게 만들곤 한다. 여러 연주들 중에서도 특별히 안드라스 쉬프의,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한 음반(ECM)을 자주 듣곤 했는데, 와... 이걸 공연장에서 직접 듣고 있노라니,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마구 들었다. 게다가 선율 사이로 들려오는 '일렁이는 음표'가 아니라 또렷하게 들리는 아르페지오의 음표들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했고 말이다.
D.915도 무척이나 멋진 연주였다. 마치 겨울 나그네의 한 부분을 연상케 하는 쓸쓸함이 전 곡에 걸쳐서 느껴지는 이 곡,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불협화음 2개 음들을 특별히 강조하여 연주하는 듯한 포인트가 특히 기억에 많이 남았다.
D.946의 2번도 언급해보고 싶은 연주. 이전에 읽었던 슈베르트 평전(풍월당)에서, 슈베르트의 곡에는 평화롭고 서정적인 전반부가 끝나면 매우 대조적인 성격의, 불협화음과 강렬한 다이내믹 등으로 펼쳐지는 파괴적인 분위기의 음악이 등장한 뒤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성향이 많다고 하는데(이를 해당 책에서는 슈베르트의 정신적 문제, 특히 내면의 공격성이 표출되는 예시라고 하고 있다.)오늘 연주된 슈베르트의 곡 중에서 이러한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곡이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있을까'싶어 전율이 흐르던 전반부에서 갑작스럽게 반전되는 두 번의 트리오, 그리고 다시금 등장하는 전반부에서는 또다시 전율이 흐르기를 반복했다. 재미있는 점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악보와는 다르게 트레몰로 형태로 멜로디를 연주하는 식으로 변형을 가미했다.
마지막으로 연주한 D.946의 3번은 앞서 연주했던 곡들과는 다르게 전반적으로 가벼운 분위기의 곡인데, '렉처 콘서트'에서 보여준 것처럼 (오늘도 그랬지만) 가벼운 유머를 곁들이는 안드라스 쉬프의 성격이 투영되는 듯한 유머러스함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듯해서 재미있는 연주란 생각이 들었다.
유머하니깐 슬쩍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 오늘도 등장한 안드라스 쉬프의 유머들. '이탈리아에 가본 적 없는 바흐'(이탈리아 협주곡을 연주하기 전),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던 인터미션'(반음계 판타지아와 푸가+템페스트 소나타를 연주하기 전), '떠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2부 시작하고 입장한 뒤에), '전혀 헝가리답지 않은 헝가리안 멜로디'(2부의 슈베르트 곡들을 소개하던 중)이 등장했다. 이것이 안드라스 쉬프 특유의 느릿한 영어와 합쳐져 관중들의 웃음을 유발하곤 했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헝가리'가 정말 웃겼는데, 안드라스 쉬프의 고향이 헝가리여서 일종의 슈베르트 디스를 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앙코르 곡으로는 무려 5곡. 특히 이번 앙코르 연주에서는 그가 평소에 연주하지 않는 쇼팽의 곡들을 3개나 연주했는데, 그의 쇼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쇼팽의 느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쇼팽의 마주르카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도 있지만 말이다.
두 번째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마주르카 15번에서는 쇼팽과 슈만 사이의 접점을 느낄 수가 있던 연주였다. 3/4 계열의 슈만의 곡(ex. Papillons op.2) 느낌이 나는데, 또 어떻게 들으면 쇼팽이 즐겨 사용하는 화성이 들리는, 굉장히 재미있는 연주였다. 더불어 괜히 슈만이 쇼팽을 치켜 세운 것이 아니구나... 란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그 뒤에 연주한 마주르카 13번은 화성적 변화만이 등장하는 도입부만 듣고 '버르토크의 곡인가?'란 생각을 할 정도였다. 물론 그 뒤에 등장하는 쇼팽 특유의 즉흥성이 느껴지는 반음계 멜로디를 통해 '아 쇼팽이구나'를 알았지만, 이마저도 뭔가 지금껏 듣던 쇼팽의 것과는 달랐다.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하여튼 달랐다.
매 번 앙코르로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 15번 1악장에서는, 첫 반복부만 연주했지만(지난 렉쳐에서 자기는 반복구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고 했었다.) 반복 연주를 할 때 더해지는 트릴과 같은 즉흥성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느낌도 들었다.
여하튼 안드라스 쉬프가 앙코르를 한 곡씩 더해갈 때마다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개중 일부는 가방을 들고 박수를 치다가 쉬프가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러 가면 '아 집에 가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관객마저 먼저 나게 떨어지게 만드는 안드라스 쉬프의 리사이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안드라스 쉬프 리사이틀의 매력이 아닐까? 란 생각도 한다.
'프로그램 없는 프로그램 북'에 실린 안드라스 쉬프 인터뷰 내용에서, 이전에는 본 적 없는 듯한 문장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손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란 내용. 이를 음악성과 테크닉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취지로 한 말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말이 참 슬프게 와닿았다.
그 말은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날이 생각보다 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마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안드라스 쉬프의 리사이틀은 정말 피치 못한 사정이 있지 않는 이상에야 무조건 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 모 커뮤니티에서는 지메르만이 한국에 놔두고 온 피아노를 사용했다는 말도 있었다. [본문으로]
'Classical Music > 내맘대로공연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0213]니콜라이 루간스키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②(@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0) | 2026.02.14 |
|---|---|
| [20260129]필리프 조르당의 브루크너 교향곡 9번 ①(@롯데콘서트홀) (0) | 2026.01.30 |
| [20260113]크리스티안 짐머만 피아노 리사이틀-Prelude @ 롯데 콘서트홀① (1) | 2026.01.14 |
| [20251118]2025 서울 바흐 축제-칸타타 시리즈@예술의 전당 IBK 챔버홀 (1) | 2025.11.19 |
| [20251002]얍 판 츠베덴과 김봄소리②(@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1) | 2025.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