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자주 듣는 편이다. 대부분의 브람스 곡들이 그렇듯 처음에 들을 때는 어렵게 들리지만, 그 단계만 극복하기만 하면 그 매력에 흠뻑 빠지듯, 이 곡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서울시향에서 이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예매를 하게 되었다.
오늘 공연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다.
=====<1부>=====
Johannes Brahms-피아노 협주곡 2번 Bb장조 op.83(피아노: 키릴 게르스타인)
=====<2부>=====
Jean Sibelius-교향곡 7번 C장조 op.105
John Adams-'원자폭탄 박사' 교향곡(국내 초연)
==================
지휘는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맡았다.
보통의 공연과는 다르게 2부에 교향곡을 2곡 연주하는 형태로 구성된 것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협주곡이 40분 후반의 거대한 길이를 자랑하는 곡인지라.
우선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부터.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이 무척 어렵다고 말하곤 하지만, 나 같이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음반을 들으면, '이게 그렇게 까다로운 곡인가?'란 생각도 들곤 했다.
다만, 프로그램 노트에도 언급된 것처럼 이 곡은 '교향적 협주곡', 혹은 '피아노 오블리가토가 있는 교향곡'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이 곡을 '협주곡'으로 보고 독주자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낼지 아니면 '교향곡'적인 성격을 반영하여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인지 1와 같은 선택지가 매 순간마다 나타나는 것이기에, 독주자와 지휘자 모두에게 음악적으로 극히 까다로운 곡이란 생각도 들긴 했다. 2
여하튼, 공연에서 이 곡을 음반과 같은 수준으로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단 얘기도 꽤 여러 곳에서 봤기에 어느 정도 기대를 내려놓고 공연장에 들어가긴 했다.
나지막한 호른의 독주와 이를 받아서 연주를 시작한 피아노 독주. 음... 시작이 괜찮은 느낌인데...? 란 생각이 들었다. 게르스타인의 연주가 오케스트라에 녹아나는 것을 보니, 오늘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연주를 들을 수 있겠군...이라 생각한 찰나, 오케스트라에서 약간의 실수가 나왔다. 물론, 이 곡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들었을 때는 딱히 어색하게 들리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하도 요새 이 곡을 많이 들어서 그런가, 내겐 확실히 느껴졌고 (억지 논리긴 하지만) 이 순간이 오늘 협주곡 1악장의 연주가 어땠는지를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오늘 1악장은 음악적 흐름이 계속해서 끊어지는 듯한 연주였다. 마치 이 곡을 적당히 나눠서 며칠에 걸쳐 연습을 마친 뒤 그냥 그대로 합쳐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각 부분만 놓고 보면(물론 종종 앙상블이 미묘하게 엇나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게 들리다가, 갑자기 전혀 다른 음악을 듣는 듯한 기분을 1악장 내내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음악적 단절이,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무척 신선하게 들리긴 하지만 오늘의 연주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차라리 독주자가 완전히 곡을 휘어잡는 연주였더라면, 그 맛에 연주를 듣는 재미라도 있었겠지만 게르스타인의 연주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기에 정말 아쉬운 연주가 되었다. 여러 음반을 들었을 때 1악장에서만큼은 피아노의 사운드가 오케스트라를 휘어잡는 강렬한 것들이 더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을 보면, 1악장에서는 '협주곡'적인 접근이 맞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도 하였다.
반면 2악장에서부터는 훨씬 나은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1악장에서 느꼈던 음악적 흐름의 단절이 2악장에서부터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컸다. 그러면 1악장은 단순히 '준비 부족'이었던 것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오늘 협주곡 연주에서 가장 좋았던 연주를 꼽자면 3악장일 것 같다. 3악장의 시작을 알리는 첼로 솔로를 비롯해서 오케스트라의 섬세한 반주도 좋았지만, 1~2악장에서는 느끼기 어려웠던 게르스타인의 섬세한 피아노 음색이 여기서만큼은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가 정말 많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보면... 애초에 게르스타인의 연주 스타일 자체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과는 상성상 안 맞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피아노의 존재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곡이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도 하긴 했다.
3악장이 끝나자마자 4악장을 바로 연주했는데, 이것도 꽤나 괜찮은 접근이지 않았나 싶었다. 일반적인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다소 가벼운 분위기의 악장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연주를 들으면서 왜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을 힘들어하는지를 제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사실 음반을 통해서는 쉽사리 느끼지 못했었는데 각 악장별로 음악적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보니 이를 모두 살려내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를테면 1악장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면서 강렬한 감정을 표출해야 하고,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분위기의 2악장, 실내악에 가까운 세밀한 사운드를 내야 하는 3악장, 마냥 가벼운 분위기지만 마지막 악장으로써 관객들에게 기억에 남을 인상을 주어야 하는 4악장까지.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해내야 한다는 난해한 테크닉들까지. 그리고 여기에는 오케스트라의 단단한 앙상블까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설령 이 모든 조건이 잘 맞는다 하더라도, 관객에게 쉽사리 와닿지 않는 곡의 특성까지... 이런 곡을 써낸 브람스는 분명 이상한 사람이 맞다.(농담이다.)
2부의 첫 곡인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은, 뭐랄까 내게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곡이다. 공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음악을 들으면서 어떠한 풍경이나 색감 같은 것을 떠올리지 못하는데, 이상하게 시벨리우스의 교향곡만큼은 새파란 겨울 아침의 눈 덮인 풍경이 쉽게 그려진다. 특히 7번 교향곡의 경우엔 멜로디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반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시벨리우스 특유의 신비로운 화성이 계속해서 귀에 들어온다. 그 탓일까? 솔직히 듣는 재미는 크지 않아서 손이 잘 가지는 않는다만... 그러한 점에서 오늘 시벨리우스 교향곡은 성공적이지 않았나 싶다. 거대한 음향적인 변화 속에서 군데군데 들리는 음악(멜로디)이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뭘 듣는 거지?'싶으면서도 그 음향에 계속해서 몰입할 수밖에 없게 되는 신기한 곡이다.
존 아담스의 곡은 음반으로 몇 개 듣기는 했는데, 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현대 음악'중에서는 그리 난해하게 들리지는 않는데, 딱히 와닿는 곡은 아직까지 없었다. 오늘 연주한 '원자 폭탄 박사' 교향곡은, 원래 그가 작곡한 오페라 '원자 폭탄 박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교향곡이라고 하며 앞서 연주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의 단악장 형식에 영감을 받기도 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현대 곡들은 아예 들어본 적 없는 상태로 공연장에서 접하는 것이 더 재미있단 것을 여러 차례 경험을 토대로 느낀 바가 있었기에 이 곡이 '원자 폭탄 박사', 즉 오펜하이머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 그리고 앞서 언급한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의 형식을 차용했다는 것 정도만 보고 곡을 들었다.
시작부터 공연장이 떠나가버릴 듯한 강렬한 총주에 이어서 복잡한 패턴으로 비슷한 음형을 연주하는 것 같은 현악기 군, 종종 강렬하게 등장하는 금관악기(특히 트럼펫과 트롬본), 심벌즈를 활로 그어 마치 전자음을 내는 듯한 효과음도 들을 수 있었다. 곡 후반부에서는 트럼펫의 멜로디를 중간에 오보에가 같이 연주하다가, 다른 목관악기(정확한 악기는 기억이 안난다.)가 이를 이어받는 부분이 몇 번 있었는데 음색이 무척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듣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오늘 관객들의 반응도 비슷했던 것 같았는데, 공연장을 나오면서 '마지막 곡이 꽤 강렬하고 재미있었다.'는 식의 얘기를 꽤 많이 엿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곡을 들으면서는 이것이 오펜하이머의 어떤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란 의문은 계속해서 들긴 했었고, 이는 나중에 프로그램 북을 제대로 읽으면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곡의 도입부의 강렬한 총주는 핵실험을 하는 '실험실'을, 중간부터 등장하는 복잡한 패턴의 음형과 뒤이어 등장하는 조용하지만 어딘가 불안감을 조성하는 부분은 '공황'을, 곡 후반부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트럼펫의 솔로 연주는 '트리니티'라고 명명된, 첫 번째 핵 실험 코드 이름이자, 오페라에서는 절망적인 심정을 담은 아리아의 멜로디라고도 했다. 아... 프로그램 북을 읽고 곡을 들었으면 연주를 더 재미있게 들었을 수 있었을 텐데... 란 아쉬움이 순간 들었다.
결론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러 갔으나, 딱히 관심이 없었던 존 아담스의 곡에 더 많은 재미를 느끼고 나온 공연이었다. 브피협 연주만 좋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ㅠ-ㅠ.
그나저나 존 아담스의 곡은 국내 초연곡이라서 쉽지 않았을텐데 꽤 준수한 연주를 한 것을 보면 서울시향의 연주력이 괜찮은 편이긴 한 것 같다. 데이비드 로버트슨의 능력도 좋은 것 같고. 종종 이렇게 현대음악을 듣는 것도 재미있긴 한 것 같다.
'Classical Music > 내맘대로공연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527]콜레기움 무지쿰 서울 제8회 정기 연주회-나폴리의 추억 (2) | 2025.05.28 |
---|---|
[20250430]Meet the Artist-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신영체임버홀) (1) | 2025.05.01 |
[20250429]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의 헨델 메시아 (1) | 2025.05.01 |
[20250330]안드라스 쉬프 &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 (0) | 2025.03.31 |
[20250329]르네 야콥스와 B'Rock 오케스트라 (0) | 2025.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