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년, '23년에 이어서 올해도 내한 공연을 하러 오신 안드라스 쉬프를 영접하고자 일찌감치 스케줄을 비워두었다. 아예 이 날은 개인 일정이 있어서 근무를 빼달라고 복무표가 나오기 전에 미리 통지까지 해두었다. 여하튼 무척 좋아하는 연주자인데 내한도 거의 매년 와주시니(사실 작년에도 계몽시대 오케스트라와 함께 멘델스존 피아노 협주곡을 포함한 레퍼토리로 내한 공연 계획이 잡혀있었는데 소리소문 없이 취소된 듯 ㅠ) 그저 감사할 따름.
지난 두 번은 프로그램을 미리 공지하지 않고 연주회장에서 곡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공개하는 특별한 스타일의 리사이틀을 진행했었다면, 이번에는 그가 창단했고 또 같이 연주활동을 하는 오케스트라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와 함께하는 공연이었다. 프로그램도 사전에 다음과 같이 공지가 되었다. (물론 앙코르 곡은 미리 공지하지 않았고...)
=====<1부>=====
Johann Sebastian Bach-건반 협주곡 3번 D장조 BWV.1054
Johann Sebastian Bach-건반 협주곡 7번 g단조 BWV.1058
Wolfgang Amadeus Mozart-교향곡 40번 g단조 K.550
=====<2부>=====
Wolfgang Amadeus Mozart-돈 지오반니 서곡 K.527
Wolfgang Amadeus Mozart-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 K.466
=====<앙코르>=====
Johann Sebastian Bach-건반 협주곡 1번 d단조 BWV.1052 中 1악장
Wolfgang Amadeus Mozart-피아노 협주곡 24번 c단조 K.491 中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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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피아니스트로써의 안드라스 쉬프는 더 이상 말을 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지만, 지휘자로써의 안드라스 쉬프의 능력에는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가 지휘한 곡들을 들어본 적도 없기도 했지만 모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지휘 능력에 대해서 박한 평가를 내리는 글을 자주 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도, 쉬프와 친분이 있는 많은 음악가들이 모여서 1999년부터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이긴 하지만 프로젝트 성의 성격이 짙은 오케스트라인만큼, 소위 '지휘자를 무시해도 연주가 잘 뽑혀 나오는' 단체의 합주력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란 생각이 들어서, 오늘 공연에 대해서 지난 두 번의 공연만큼의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1
무대를 보니 바이올린 1-첼로-비올라-바이올린 2에, 베이스를 각각 양 쪽에 한 명씩 배치한 형태였고, 피아노는 그 사이에 비스듬하게 두는 형태였다. 역시, 피아노의 기종은 지난 두 차례 내한 공연 때 봤었던 '뵈젠도르퍼'였다.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 단원들이 먼저 입장한 뒤, 안드라스 쉬프가 특유의 느릿한 걸음으로 무대 위에 등장했다. 단원들의 모습을 보니 젊은 단원들은 거의 없었고, 몇몇 단원들은 은퇴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계셨다.


보통은 오케스트라가 튜닝을 하고, 그 뒤에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하는데 그런 것 없이 박수가 조금 잦아들자 곧바로 첫 곡을 시작했다. 첫 시작부터 바이올린의 소리가 정리되지 않고 각기 들리는 것에, '아 오늘 오케스트라에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바흐의 건반 협주곡에서 독주 파트가 콘티누오 역할까지 겸하기 때문에, 첫 예비박 이후에는 비팅을 통한 템포 조정이 불가능하여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래서 두 곡의 바흐의 협주곡 모두 1악장 첫머리는 어수선하게 시작했다가 갈수록 정돈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마지막 악장에서는 앞선 악장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상당히 괜찮은 합주력을 보여줬다.
쉬프의 연주에 대해서는 더 첨언할 것이 있나 싶었다. 그냥 '바흐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유일한 예외, 쉬프가 연주하는 바흐.' 그 자체였다. 바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성부를 온전히 살리고, (아마) 왼손을 통해서 등장하는 중심 화성의 강조와 같은, 독특하지만 대단히 설득력 있는 연주가 귀에 들어왔다. 추가적으로, 보통 이 곡을 피아노 협주로는 잘 듣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로 피아노로는 어색하게 들리는 음색이 있는데, 오늘 공연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피아노의 소리가 튀지 않고 오케스트라와 잘 융화되는 것 같았다.
바흐의 협주곡이 끝나고,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를 무대 옆으로 옮기는 작업이 잠깐 진행되었다. 포디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휘자가 위치해 있는 공간이 다른 오케스트라 연주에 비해서는 다소 넓게 조성된 편이었다. 연주자들이 다시 자리에 앉은 뒤 본격적으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우선 쉬프의 지휘 스타일은 공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표현을 오케스트라에 지시하는 듯했고 비팅은 정말 간혹 하는 편이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단체가 쉬프와 오랜 기간 같이 활동을 해왔기에 앙상블을 맞출 수 있었을 것 같을 정도로 보기 쉬운 지휘는 아니었다. 지시도 대부분 비올라와 바이올린 2, 간혹 관악기 파트에 내리는 편이었다.
쉬프가 표현하고자 했던 모차르트의 교향곡의 방향성은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우선 그가 지난 공연들에서 말했던 'Singing Composer'로서의 모습. 1악장 어딘가의 짧게 등장했던 퍼스트 바이올린의 모티브가 굉장히 멋지게 들렸는데, 집에 와서 그 부분을 다시 찾아보려 했지만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두 번째는, 바흐 스페셜리스트다운 대위법의 표현. 특히 이 교향곡의 피날레에서는 곡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대위법이 등장(대략 152마디 정도)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를 나름대로 잘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이 곡에서 존재감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제 때 등장하면 정말 멋있게 들리는 호른을 강조한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좋게 들은 부분이다. 2
반면, 어떠한 표현 없이 그저 밋밋하게 흘러가는 부분들이 많았던 점은 아쉬웠다. 특히 이러한 부분이 가장 안 좋게 드러난 부분이 2악장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 교향곡의 2악장의 경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관객들에게 흡입력 있는 연주를 들려주기가 극히 까다로운 악장이라고 생각하는데, 템포를 조금만 느리게 잡아도 곡이 늘어지게 들리고, 그렇다고 모차르트의 다른 완서 악장처럼 아름다운 멜로디가 흐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근데 쉬프의 해석에서는 '이거다!'싶은 포인트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서 쉬프의 지론 중 하나인 '도돌이표는 모두 살려서 연주해야 한다.'가 겹쳐버리니...
인터미션 중에 피아노를 다시 원위치로 돌려놨는데, 2부의 첫 곡이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 서곡'이었기에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다. 아까처럼 피아노는 서곡이 끝나고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 전에 옮겨도 되는데, 굳이 이렇게 미리 옮기는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었다. 그중 하나는 프로그램을 갑자기 바꾸어, 서곡 대신 피아노 협주곡을 하나 더 연주하는 것이거나, 아님 서곡 이후 바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돈 지오반니 서곡은, 무난... 했지만 팀파니의 볼륨을 조금 줄이는 방향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팀파니가 나올 때 다른 악기 소리가 사라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곡이 끝나자마자 바로 d단조 협주곡을 시작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쉬프가 이런 형태의 프로그램 구성을 종종 했다고 하는데 처음 듣는 나로서는 꽤나 설득력 있고 또 신선하게 느껴졌다.
모차르트의 협주곡에서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연주를 오케스트라도 쉬프도 들려줬다고 생각한다.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의 설립 취지가, 쉬프가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주간' 행사에 올릴 목적으로 결성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바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일 것이다.
바흐 때와 마찬가지로,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는 돋보이는 피아노 독주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함께 조화를 이루는 연주를 지향했던 것 같았다. 그 외에는... 그냥 그의 연주를 홀린 듯 들었던 것 같다. 다만 딱 한 부분, 3악장에서 순간적으로 오케스트라와 쉬프의 연주 모두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어색하게 들렸던 순간이 있었다.
그 외에는 3악장의 카덴차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카덴차 앞에 돈 지오반니 서곡의 모티브를 활용한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프로그램의 구성을 생각해 봤을 때 2부를 하나의 거대한 곡처럼 엮는 멋진 시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1악장 중간에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한 사람이 박수를 쳤는데, 순간 몰입이 깨졌던 것도 있었지만 연주자들이 연주를 멈추게 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왜 이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앙코르 곡으로는 바흐의 건반 악기 협주곡 1번 d단조 1악장, 그리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2악장을 연주해 주었다.
바흐의 건반악기 협주곡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 1번인데 이번 연주의 정규 프로그램에는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것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었다. 오케스트라도 쉬프도 정말 신들린듯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독주 파트에서 오랜 시간 양손을 겹쳐서 연주하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전율은 대단했다.
마지막으로 연주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2악장도 감동스러운 연주였다. 이번 연주회, 아니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의 마지막 아시아 투어를 마무리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었다.
지난 두 번의 리사이틀과 전혀 다른 성격의 연주회였고 위에서 써내려간 것처럼 아주 멋진, 기억에 남을 만큼 완벽한 연주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지금껏 들었던 쉬프의 피아노가 아닌, 그의 지휘자로써의 능력과 최상급은 아닌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연주는 내게 특별한 기억을 남을 것 같은 생각은 든다. 이는, 내 옆에 계신 아저씨께서 인터미션 때 하셨던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원들 나이가 엄청 있어 보이는데, 표정이 너무 밝고 여유 있어 보여서 참 보기 좋은 것 같아. 대단해." 물론 프로 음악가들은 결국 연주력이 가장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왜 음악을 듣고, 또 (나의 경우에는) 연주하는지에 대한 평범하지만 명쾌한 답을 오늘 무대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담) 프로그램 북에는 오늘 연주가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의 '마지막 공연'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들의 진짜 마지막 무대는 '2026년 5월' 이탈리아 Vicenza의 Teatro Olimpico에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 심지어 오케스트라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단원 변경조차 거의 없었다고 .https://takorine-and.hatenablog.com/entry/2025/03/16/113047 [본문으로]
- 번스타인 후기 녹음, 아르농쿠르의 후기 녹음 등에서 1악장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호른의 시그널이 좋은 예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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