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al Music/내맘대로공연리뷰

[20240110]크리스티안 짐머만 피아노 리사이틀

MiTomoYo 2024. 1. 11.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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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들어서 블로그 포스팅을 쓰는 것에 대한 의욕을 많이 잃어버린 것 같다. 2달 전 다녀온 일본 여행 후기도 아직 채 마무리 짓지도 못했고, 매년 올리던 간단한 새해 인사 포스팅도 이번에는 작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블로그를 접자니 지금껏 함께한 11년이란 시간을 포기하는 것만 같아서, 쉽진 않겠지만 꾸역꾸역 운영을 할 생각이다.

 

여하튼, 새해 첫 포스팅은 공연 후기다.

 

현재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안드라스 쉬프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을 가장 좋아한다. 그중에서 안드라스 쉬프는 재작년과 작년 리사이틀을 모두 다녀왔지만, 어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최근 들어 꽤 자주 내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사이틀을 가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반드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과 10일 공연 중에서 예매 당시 괜찮은 좌석이 많이 남아 있었던 오늘 공연을 택하게 되었다. 오늘 공연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다.

 

=====<1부>=====
Frederic Chopin-녹턴 2번 Eb 장조 op.9-2

Frederic Chopin-녹턴 5번 F#장조 op.15-2

Frederic Chopin-녹턴 16번 Eb장조 op.55-2

Frederic Chopin-녹턴 18번 E장조 op.62-2

Frederic Chopin-피아노 소나타 2번 bb단조  op.35
=====<2부>=====
Claude Debussy-판화 L.100

Karol Szymanowski-폴란드 민요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10
=====<앙코르>=====
Sergei Rachmaninoff-전주곡 g#단조 op.32-12

Sergei Rachmaninoff-전주곡 D장조 op.23-4

Robert Schumann-3개의 로망스 o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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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의 프로그램은 개인적으로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곡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시마노프스키는 말할 것도 없고, 드뷔시나 쇼팽 모두 즐겨 듣는 작곡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마노프스키는 최근에 출퇴근 길에 지메르만의 최근에 발매한 음반을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익숙해지고 있었다.

 

서곡 개념으로 연주한 쇼팽의 녹턴은, 사실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다. 멜로디가 아름답고 그리 난해한 곡이 아니기에 대중적으로 잘 어필할 수 있는 곡이란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마냥 유유자적 흐르는 멜로디가 듣다 보면 지루하게 느껴지는 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오늘 연주에서도 이러한 나의 견해를 뒤집을 정도의 연주를 들을 수는 없었다. 지메르만의 연주가 나빴다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라 생각하며, 전적으로 내 취향에 맞지 않을 뿐이란 사실을 다시금 체감한 순간이었다. 첫 곡으로 연주한, 대중적으로 정말 유명한 녹턴 2번의 경우 극한의 루바토를 굉장히 많이 구사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나머지 곡들은 무난하단 생각이 들었기에, 음반을 통해서 들었던 지메르만 특유의 색채감을 잘 느낄 수가 없었기에 오늘 리사이틀이 그동안 가져왔던 지메르만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의 첫 도입부의 강렬한 저음이 들리는 순간 괜한 걱정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평범하게만 들렸던 피아노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어딘가 불길하면서도 악의가 가득 차오른 듯한 성질의 것이었다. 1악장과 2악장의 트리오 이전까지를 지배하는 이러한 곡의 분위기가 다소 잔잔한 분위기에 트리오에 들어서자 피아노의 음색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부분을 서로 다른 피아니스트가 쳤다고 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였다.

'장송 행진곡'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이 소나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3악장은, 개인적으로는 오늘 공연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부분이었다. 관을 짊어진, 무겁고 비통에 찬 발걸음이 간신히 이동하고 있는 듯한 행진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행복했던 추억들이 잠시 눈앞에 아른거리다가,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듯한 행진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질 정도였고, 중간에 등장하는 아련한 멜로디에는 살짝 눈물이 고이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연주회장에서 연주에 내 감정이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음표들이 등장하는 마지막 악장의 경우, 중앙 좌석임에도 과한 울림이 인상적인 롯데 콘서트홀의 음향 덕분에 명료하단 인상까지는 받지 못했지만 3악장의 행렬 뒤의 격한 감정만큼은 확실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정말 오래전에 나 가끔씩 들었던 이 곡이 이렇게까지 멋지고 좋은 곡이었단 사실을 오늘 공연을 통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2부의 첫 곡으로 연주된 드뷔시의 '판화'란 곡은 아시아(특히 인도네시아 쪽)의 영향을 꽤나 많이 받은 곡이란 사실을 인터미션 중에 읽은 팜플랫을 통해서 미리 접했었고, 그에 걸맞게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곡이었다. 어떤 부분은 왠지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악으로 삽입되어도 정말 잘 어울리겠다 싶은 지점도 있었다.

지메르만의 피아노 연주는 쇼팽의 소나타에서 들었던 악마적인 강렬함을 싹 걷어낸 뒤 신비로운 음색을 통해서 곡의 분위기를 한 층 멋지게 살려내주었다. 사실 드뷔시의 피아노 곡들이 가지는 이러한 이질적인 분위기를 적응할 수 없어서 그의 곡을 찾아서 듣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었는데 오늘 공연을 통해 드뷔시의 곡도 참 매력적이구나를 새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정규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인 시마노프스키의 '폴란드 민요 주제에 의한 변주곡' 음반을 통해 들으면서 쉽진 않아도 세련된 화성 진행이 매력적인 곡이란 것까지는 알았지만, 대체 어디에 폴란드 민요가 등장하고, 변주곡이란 요소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포착하는 데는 전혀 몰랐던 상황이었다.

하나 오늘 지메르만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 곡의 중심이 되는 민요가 어떤 멜로디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교묘하게 숨겨져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비록 모든 변주곡에서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곡이 진행되는 동안 중심 주제가 나타나는 부분을 살짝 더 강조해 주던 지메르만의 해석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일까 이 곡 역시 굉장히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고, 지금껏 들으면서 느꼈던 것 이상으로 잘 만든 곡이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1부와 2부 중간에 벨소리와 알람소리가 한 번씩 나긴 했지만, 다행히 감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그것만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관객 매너가 꽤나 좋았었다. 요새 들어서 앙코르를 연주하면 동영상으로 찍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서 언짢게 느껴질 때도 많았는데, 사전에 공지가 잘 된 덕분인지는 몰라도 오늘은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내 주위에는 없었던 것 같았다. 앙코르 곡은 총 세 곡을 연주했는데 사실 세 곡 모두 잘 모르는 곡인 데다, 세 곡 모두 잔잔한 분위기의 곡이어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내한 공연을 진행하는 동안 지메르만이 감기에 걸렸단 얘기를 얼핏 본 것 같았는데, 오늘도 곡 중간에 기침을 하거나 하는 것을 봐서는 아직 완쾌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미디어를 통해 굉장히 까탈스러운 성격이라고 대중들에게 꽤나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녹턴 중간에 관객들이 기침해도 된다고 손짓을 한다거나, 커튼콜을 하면서 여러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보면 나름 괜찮은 무대 매너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피아노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해보고 싶다. 전용 피아노를 직접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를 한다는 사실을 꽤나 널리 알려지긴 했고, 'Steinway & Sons' 마크 아래에 잘 보이진 않지만 뭔가 독특한 마크가 하나 피아노에 붙어 있었던 것을 보면 오늘 공연에서도 본인의 피아노를 사용했었던 것 같았다. 인터미션 때 1층 관객들이 사진 찍은 것을 보면 아마 맞을 것 같다.

근데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껏 공연과는 다르게 지속음 페달의 효과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타 다른 피아노와는 다르게 지속음 페달을 밟았을 때 남겨지는 소리가 유난히 길고, 또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일전에 안드라스 쉬프의 리사이틀에서 연주되었던 베토벤의 '템페스트 소나타'에서 지속음 페달의 잔향을 통해서 독특한 화성적 변화를 느낄 수 있다고 설명을 해주었고 직접 들려도 줬지만, 집중해서 들어야만 알 수 있을 만큼 쉽게 느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 공연에서는 페달링을 할 때 살짝만 신경 써서 들으면 공연장 내부를 은은하게 채우는 소리를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피아노 조립과 제작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지메르만인데 대체 피아노에 어떤 일을 했기에 이토록 독특한 효과를 줄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사실 지메르만의 주력 레퍼토리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독일/오스트리아계 작곡가의 작품들이 아니다보니 공연 예매를 한 뒤에도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긴 한데 과연 공연장에서 만족스러운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란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리사이틀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지메르만과 쉬프의 내한 공연들은 기회가 되는 한 관람해야겠단 사실을 말이다. 더 좋은 사실은 둘의 연주 스타일도, 레퍼토리도 확연히 달라서 공연장에서 같은 곡을 여러 번 들을 일도 없을 것이란 점이다! 여하간 2024년 첫 공연이 무척 만족스러워서 기분이 좋다. 올해도 좋은 공연들 많이 들으러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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