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al Music/내맘대로공연리뷰

[20220903]파보 예르비&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MiTomoYo 2022. 9. 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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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후기에 앞서 먼저 사족을 달아야 할 것 같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이번 주말을 포함해서 2주 동안 악기 없는 주말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기간을 정말 악기와는 조금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날을 잡고 10월 초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되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을 반드시 갈 생각이었다. 원래 계획은 사진전을 보고 예술의 전당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이나 찍으려 했는데, 인스타그램에서 파보 예르비가 이렇게 떡하니 사진을 올려놓은 것을 보고 왠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음반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들은 그의 음악이 늘 좋았기 때문이었다.

 

출처: Paavo Jarvi 공식 인스타그램(@pjarvi)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매는 가능한지(당일 예매가 가능하단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티켓 가격은 적절한지, 그리고 괜찮은 좌석이 있는지를 봤는데 3층 완전 중앙, B석이 떡하니 있는 것을 보고 충동 예매를 시전 했다. 마침 집에서 괜찮은 시간에 나온 덕분에, 2시간 정도 여유 있게 사진전을 보고 30분 정도를 방황하다 공연장에 들어가면 딱 되는 스케줄이었다.

 

사족은 여기까지. 프로그램 북을 사고 나서야 오늘 공연에서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를 알았다.

===========================<1부>==================================

Arvo Part - 밴저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

Johannes Brahms -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 a단조 op.102

(Vn-Triin Ruubel, Vc-Marcel Johannes Kits)

<앙코르>

Giovanni Battista Cirri -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듀오 op.13-6, 2악장 아다지오

===========================<2부>==================================

Erkki-Sven Tuur - 십자가의 그림자

Pyotr Ilyich Tchaikovsky - 교향곡 5번 e단조 op.64

<앙코르>

Jean Sibelius - 안단테 페스티보

Hugo Alfven - 발레 'pantomime Bergakungen' op.37 중 양치기 소녀의 춤

=================================================================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배치인 바1-첼-비-바2 로 세팅이 되어 있어서 괜히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아르보 패르트는 (비록 그 조예가 그리 깊지는 않지만) 현대 작곡가들 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이다. 난해하지 않고 화성의 변화를 통해 명상적인 느낌을 주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오늘 연주된 '밴저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 역시 그런 부류의 곡이었는데, 현악기와 종으로만 구성된 이 곡은 그저 흘러가는 듯한,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기분 하나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곡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르보 패르트가 에스토니아 태생의 작곡가란 사실도 있겠지만, 이 곡을 통해서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현악기군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보여주기에도 참 적절한 선곡이었던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부드럽지만, 결코 유약하게 느껴지는 질감의 소리였다.

사실 곡에 '이거다!' 싶은 포인트가 없는 곡이기에 제대로 연주하지 않으면 정말 밋밋하게 들릴만한 곡이었을 텐데 듣는 내내 계속해서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인터미션 때 내 뒤의 분들도 1부 중에서 이 곡이 가장 좋았다란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은 어렸을 때는 자주 들었지만, 요새는 기억 속에서 거의 잊힌 곡이다. 그래서 무척 오랜만에 이 곡을 들어보게 되었다.

오늘 연주는 호불호가 갈릴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독주자들이 곡을 전반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오케스트라의 반주를 통해서 곡이 진행되길 바랬다면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리진 못했을 것 같다. 대신 (개인적으로 브람스의 모든 협주곡들이 다 이런 스타일이라고 생각은 하는 편인데)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협연자들이 같이 조화되는 연주를 좋아한다면 오늘 연주는 괜찮게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두 명의 협연자가 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본인들의 해석을 한껏 과시하기보다는 서로 호흡을 맞추는데 주안점을 둔 연주였는데 그것이 무대에서 충분히 보였고, 또 들렸다고 생각한다. 3악장에서는 두 협연자 간의 음량을 좀 더 조정했으면 좋았겠다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크게 엇나가는 부분은 없었던 것 같았고 중간중간 다이내믹이 여려지는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공연장을 꽉 채우는 엄청난 음량도 깊은 전율을 주지만, 때론 숨을 죽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여린 소리 속에서도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앙코르로 연주한 곡은 딱 고전 스타일의 곡. 무난하고 예쁜 연주였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멋졌다. 협주곡임에도 이렇게 오케스트라의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연주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았다. 종종 예르비의 지휘에 따라 특정 파트가 확 강조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이를테면 1악장 비올라 파트) 그것이 꽤나 신선하게, 그러나 과격의 수준까지는 넘어서지는 않는 절묘함이 느껴졌다.

 

1부의 연주로 한껏 기대감이 오른 상태에서 2부 연주를 들었다. 에르키-스벤 튀르는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로, 1부에서 연주된 아르보 패르트의 곡과 마찬가지로 현악기로만 연주되는 곡이었고 분위기도 꽤 비슷한, 하지만 멜로디가 더 구성된 느낌의 곡이란 느낌을 받았다. 에스토니아 작곡가들의 특징이 원래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찾아서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늘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은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만 공연도, 연주도 여러 번 해본 인연이 깊은(?) 곡이다. 요새 들어서 지휘자에 따라 이 곡의 매력 포인트를 다들 다르게 가져간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어서 [각주:1], 과연 파보 예르비는 어떤 스타일의 연주를 들려줄지도 궁금했다.

파보 예르비의 해석은,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변화무쌍함이었다. 이 곡의 특징 중 하나가 같은 프레이즈가 여러 번 반복이 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인데 이를 다이나믹이나 템포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줌으로써 같은 구절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연주들이 여러 부분에서 포착이 되었다. 1악장에서 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오케스트라가 큰 실수를 하거나 한 줄 알았는데, 재현부에서 똑같은 접근을 하고 나서야 이것이 의도적인 것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3악장에서 등장하는 게슈토프 주법의 호른의 음가를 전부 다르게 연주하도록 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전 악장을 거의 아타카 형식으로 연주하거나 4악장 서주 후의 Allegro vivace 부분에서 팀파니가 한 번 쾅하고 내려치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각각 2017년 서울시향-인발의 연주(https://electromito.tistory.com/366)나 번스타인 만년의 녹음 등(https://electromito.tistory.com/240)을 통해서 접해본 적이 있었기에 놀라움의 범주에는 들어가는 영역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전반적으로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간혹 정말 어이없는 실수도 있었던 느낌도 있었다. 본디 연주란 것이 '누가 누가 안 틀리나'를 찾아내는 예술이 아니지만, 지금껏 이 곡을 너무 많이 들어온 탓에 갑자기 귀에서 어색함이 느껴지는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를 극복해보고자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파보 예르비의 해석이 계속적인 변화를 요구하기에, 앙상블이 흐트러질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 해석들을 전부 받아내서 멋지게 연주해내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또 한 가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작게 시작한 테마가 콘서트홀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강렬한 음량으로 끝나는 엄청난 크기의 다이나믹 폭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파트는 바순이었다.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는 솔로 부분이 아니면 그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악기가 바순인데, 오늘 공연에서는 특별히 바순을 강조하는 부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맹맹한 소리가 3층에서도 잘 전달돼서 꽤나 놀라움이 느껴졌다.

 

앙코르로 연주한 곡은 시벨리우스의 안단테 페스티보와 알벤이란 작곡가의 발레곡이었는데, 시벨리우스의 안단테 페스티보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곡이라서 무척 기뻤다. 특히나 오늘 연주에서 이미 여러 차례 느꼈던,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현악군의 발군의 실력이 곡을 한 층 멋지게 만들어주었다. 두 번째 곡은 활기찬 분위기, 그러니깐 딱 앙코르에 어울릴법한 곡이었다.

 

끝나고 사인회가 있었는데, 팜플랫에 받고 싶진 않아서 그냥 돌아왔다. 집에 나선 뒤에 예매를 한 탓에 CD를 챙기지 않아서 어마어마하게 아쉬웠다. 그렇다고 현장에서 음반을 사기도 조금 그랬다. 집에 이미 좋게 들은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나 슈미트 교향곡 전집이 있는데, 그것을 두고 들어보지도 않은 음반을 아무거나 사서 받는 것도 좀 그랬고, 오늘 꽤 많은 지출을 한 탓에 돈을 더 쓰는 것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12월에 도이치 캄머 필을 이끌고 또 내한을 한다고 하니 그 때를 노려보는 수 밖에.

 

즉흥적으로 결정해서 가게 된 공연이었는데, 가길 정말 잘했다란 생각이 들었다. 파보 예르비 특유의 강렬함과 독특함이 공연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고,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수준도 무척이나 높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 월요일, 수원에서는 교향곡만 시벨리우스 2번으로 바뀐 프로그림이 연주가 된다는데,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1. 멜랑콜리한 선율미의 카라얀(DG, 빈필), 발레적 접근의 번스타인(DG, 후기), 강렬한 다이나믹의 므라빈스키, 그리고 핵노잼의 뵘까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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