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다만, 제임스 에네스가 내한했던 공연에서 엄청난 연주를 들었다는 호평을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작년에도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리사이틀로 내한했었지만 못 갔고, 올해 이렇게 서울시향과 협연을 한다고 해서 예매를 하게 되었다. 사실 28일(토)에 하는 실내악 시리즈를 더 가고 싶었지만, 근무 일정이 잡혀서 어쩔 수 없이 오늘 공연을 예매했다.
반면 에드워드 가드너는 2023년에 그가 상임으로 있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에서(링크: https://electromito.tistory.com/868) 아쉬운 연주를 들었기에, 브람스보다도 훨씬 난도가 높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그것도 그가 객원으로 오는 연주에서 잘 연주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실내악 공연을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오늘 공연 프로그램부터
=====<1부>=====
Felix Mendelssohn-Bartholdy-핑갈의 동굴 서곡 op.26
William Walton-바이올린 협주곡 b단조(바이올린: 제임스 에네스)
(Encore) Eugene Ysaye-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d단조 op.27-3
=====<2부>=====
Richard Strauss-알프스 교향곡 o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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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는 에드워드 가드너가 맡았다.
첫 곡인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 듣고 있다 보면 깎아지는 높은 절벽이 있는 외딴섬,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 거센 바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한다. 오늘 가드너의 지휘는 평소에 여러 음반에서 들었던 것보다는 살짝 빨랐는데, 내겐 몰아친다와 성급하다 사이의 느낌이었다. 마냥 빠르게만 몰아붙였다면 진짜 재미없는 연주였을 법했지만, 곡 중간에 등장하는 잠깐의 평화에선 템포를 다소 이완시켜 두 이미지 간에 확실한 대조를 느낄 수가 있었던 점이 좋았다. 자극적인 사운드를 위해서, 1층 앞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전 팀파니와 나무 말렛을 사용한 것 같았는데 이 역시 무척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바다를 묘사하는 현악기의 일렁임이 좌(퍼스트 바이올린)-우(비올라) 간에 잘 안 맞았던 것 같아서 그 점이 살짝 아쉽긴 했다.
이어서 연주한 윌리엄 월튼의 바이올린 협주곡. 얼마 전에서야 그의 첼로 협주곡을 들었었는데 역시나 아리송함만 남은, 아직은 생소한 작곡가로, 이 곡의 경우 하이페츠를 위해 써서 테크닉적으로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공연 시작 전에 팜플랫을 통해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표현한 것과 요양을 위해 다녀온 이탈리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내용을 읽었다. 이 내용을 본 것이 정말 다행이었는데, 이 곡을 처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포인트를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2악장에서의 긴박한 음형과, 이와 대조를 이루는 서정적인 부분에서 '아 프로그램 북에 쓰인 내용이 이런 것이구나!'를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네스의 연주는... 듣는 내내 감탄만 나오게 만들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기교가 등장하는 부분을 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어렵고 버겁게 들리지 않을 만큼 깔끔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처음 듣는 사람에겐 결코 쉽게 와닿지 않는 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게 만들 정도로 집중하게 만드는 연주였다.
유려한 멜로디가 흐르는 부분에서의 표현력도 멋있었다. 1악장에서 G현에서 연주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했는데, 보통 이런 경우 굵은 음색이 만들어지지만 다소 거친 소리가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에네스의 연주에서는 농밀하면서도 깔끔한 소리가 들려왔고, 2~3악장 사이에서는 정말 어렸을 때 듣곤 했던 하이페츠의 음반(그중에서도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스코틀랜드 환상곡이 수록된 것)을 연상케 하는 소리가 들려서 무척 재미있었다.
서울시향의 반주는... 사실 처음 듣는 곡인지라 뭐라고 언급할 부분이 없다. 듣기에 어수선한 부분은 딱히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다.
앙코르로는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중 가장 유명한 3번을 연주했는데, 와... 이 역시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연주였다. 왼손이 숨 가쁘게 움직이지만 귀에 들려오는 것은 깔끔하게 정돈된 소리였다. 사실 이자이의 곡들도 내게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이 곡이 이렇게 멋지고 낭만적인 곡이었나?'란 생각을 들게 만들 정도로 다른 곡을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담으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또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와 정반대에 있는 연주자란 생각이 들었는데 테츨라프가 곡에 내재한 에너지와 감정을 들려주는데 탁월한 연주자라면, 제임스 에네스는 정확하고 깔끔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선율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잘 들려주는 연주자란 생각이 인터미션 중에 잠깐 들었다.
2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현시점에서는 유일하게, 그리고 그나마 좋아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이다. 이른 아침 알프스 산에 올랐다가 해가 지고 하산하기까지의 과정을 표현한 작품이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어서 그런 것 같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밤'을 표현하듯 모호한 조성으로 곡이 시작되고 금관악기군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는 웅장한 알프스 산의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하는데, 시작하는 분위기는 괜찮았... 었는데 뒤에서 벨소리가 작게 여러 번 울렸다. 아직 음악이 고요하게 흐르는 부분이어서 화가 날 수도 있었는데, 갑자기 알프스의 누군가가 조난당해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인가? 란 생각을 하니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해돋이' 부분으로 넘어가면서 신비롭고 고요했던 주위가 갑작스레 환하게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장엄한 풍경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들을 법한 음악이 계속해서 흐르던 중, 왼쪽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저 멀리서 들리는 뿔피리의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나 역시 금관악기의 팡파르가 울리는 동안은 시선이 열린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면서' 등장하는 현악기의 일사불란한 아르페지오. 왠지 이런 부분은 늘 앙상블이 흐트러질 것만 같은데 오늘 서울시향의 연주에서는 일사불란한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들을 때마다 재잘거리는 바이올린의 소리를 어떻게 구현한 것인지 정말 궁금했던 '폭포'와 '환영'에서는, 이를 실제로 들으니 음반으로 들었을 때보다 훨씬 신기했고, '알프스의 목장'에서 들리는 소방울 소리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시야에 잘 들어오진 않았지만 양쪽에서 카우벨을 흔들었었던 것 같다.
때론 섬세한 표현을 활용하다가, 또 어떤 때는 무대를 가득 채운 관현악단이 뿜어내는 엄청난 음량에 압도되기도 하면서 어느새 '알프스의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 도달했다는 기쁨과, 산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멋진 풍경에 압도된 감정을 공연장에서 들으니, 역시 음반에서 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전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역시, 대편성 관현악곡은 실연으로 들었을 때 그 진가를 체감하게 되는 것 같다. 이어서 산을 내려가는 와중에 '폭풍우'를 만나는데, 개인적으로 이 파트를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바람이 불다가 종국에는 거대한 음향적 혼란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게 기억할 수밖에 없고 또 '윈드머신'과 '선더머신'이란 특수 악기의 존재로 인해 재미있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윈드머신은 '바람'보다는 '스네어 드럼'의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살짝 아쉽긴 했지만, 오케스트라가 온 힘을 다해서 만들어내는 폭풍 소리는 역시... 멋있었다.
이어서 등장하는 '종결'은, 기억에 잘 남는 부분은 아니었는데(애초에 이 곡을 자주 듣는 편은 아니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들 중에서는 '그나마 자주' 듣는 편이지만...) 이렇게 멋진 부분을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인 파트였다. 오늘 공연에서는 전자 오르간을 썼지만 이것을 실제 오르간으로 듣게 된다면, 얼마나 더 멋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앞서 들었던 다양한 모티브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다시금 '밤'의 어둠이 등장하면서 다시 곡의 처음으로 되돌아오면서 고요히, 그리고 누군가의 '카톡'으로 다시금 조난 신호를 듣는 것으로 오늘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오늘 서울시향의 2부 연주는 괜찮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밤에서 해돋이로 넘어가는 부분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넘어간 것은 아쉬웠지만, 그 외에는 별로였다고 할 만한 부분은 개인적으로는 없었다.
오케스트라 총주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은 적당히만 잘해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쉽지만, 음량이 작고 세밀한 부분은 음악적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편인데 오늘 공연에서는, 총주와 약주 간에 밀당이 적당히 잘 이뤄진 것 같아서 긴 연주시간 내내 정말 재미있게 들을 수가 있었다. 이틀씩 같은 프로그램으로 공연을 하는 경우, 이틀 중 한 번만 공연을 가도 충분했었는데, 왠지 이번만큼은 내일 공연도 뭔가 가보고 싶다는 미련이 생길 만큼 좋았다. 선약을 잡아둬서 내일은 못 가지만, 오늘 공연에서 녹화용 장비가 여럿 보였던 것을 봤을 때, 어디서든 오늘 공연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하게 된다.
공연 끝나고 사인회가 있다는 공지를 봐서 미리 음반을 챙겼다. 가드너의 경우 가지고 있는 음반이 없어서, 이번에 새로 발매한 LPO레이블의 드보르작 교향곡 7번&슈만 교향곡 2번을, 에네스의 경우 여럿 가지고 있어서 뭘 챙길까 하다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현악 사중주인 베토벤 현악 사중주 13번이 수록된 음반을 들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간단하게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나는 그럴만한 용기는 없어서... 가드너의 경우 음반을 보더니 "Oh! It's brand new one!"이라고 해주었고, 에네스도 사인해 주고 뭐라고 한 마디 해주었는데 제대로 못 듣는 바람에 ㅠㅠㅠㅠ
그리고 공연과는 전혀 상관없는...
원래는 2층 중앙에 예매를 했었는데 '무려' 지휘자 초청석 초대권으로 승급하게 된 과정(헿!). 오케스트라 협연을 1층 중앙 앞에서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협연자의 연주 소리가 무척 잘 들려서 정말 놀랐음. 이젠 2층 중앙 앞열로는 만족할 수 없는 1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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